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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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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찬은 전조의 황족이자 황제(재위 318년)로, 유총의 차남이다. 하내왕으로 봉해져 유요와 함께 서진과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유총 사후 황제에 즉위했다. 하지만 외척 근준에게 정사를 맡기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간통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근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고 유씨 일족이 몰락하면서 전조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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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 (전조)
기본 정보
이름유찬
한자劉粲
사광 (士光)
칭호황제
왕조전조
재위 기간318년
묘호없음
시호효은황제 (孝隱皇帝)
아버지소무제
어머니호연황후
배우자근황후
자녀유원공
사망 년도318년
연호한창 (漢昌)
연호 기간318년
통치
즉위318년 9월 1일
계승자근준

2. 생애

310년 유총(劉聰)이 한의 황제로 즉위하자 유찬은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었다. 친척인 유요와 함께 서진(西晉)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311년 낙양을 함락하였으며, 이후 장안 및 진양 방면의 전선에서 유요와 함께 활약하였다. 당시 한의 후계자는 유총의 배다른 동생인 황태제(皇太弟) 유예(劉乂)였는데, 유찬은 외척인 근준(勤準) 및 여러 환관들과 합심하여 유예를 모함하여 폐위해 살해하였고 뒤이어 배다른 형인 유역(劉易)도 모함하여 살해하였으며, 마침내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 아버지인 유총에게 사마업을 처형하라고 조언했는데 이 때문에 사마업이 처형당했다.

유찬은 유총의 첫 번째 부인 호연황후의 아들이었지만, 유총이 형 유학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후 31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총이 아버지 유연의 두 번째 부인 단황후의 아들인 그의 형제 유애(劉乂)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317년 가을, 유총은 유찬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났으며, 문무를 겸비했다고 한다.

310년 8월, 아버지 유총이 황위에 오르자, 하내왕(河內王)에 봉해졌고, 사지절(使持節)·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숙부 유예가 황태제가 되었기 때문에, 유찬은 세자로 세워지지 못했다.

10월, 정동장군 왕미, 용양장군 유요 등과 함께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략하러 가서, 진(晉)의 감군 배막을 면지에서 격파하고 낙천(洛川)으로 들어갔다. 환원(轘轅)을 나와 양국, 진류, 여남, 영천 일대를 공격하여, 100여 개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311년 9월, 평서장군 조염과 안서장군 유아장안을 공격하자, 유찬은 유요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후방 지원을 했다. 한(漢) 군대가 하규에 이르자 사마모(司馬模)는 항복했고, 유찬에게 보내졌다. 유찬은 사마모와 아들 범양왕(范陽王) 사마려를 살해하고, 위장군양분, 장사 로요, 산기상시 두오, 신밀, 북궁순 등을 평양으로 보냈다. 유총은 사마모를 살해한 것에 크게 분노했지만, 유찬은 "신은 사마모가 자신의 천명을 늦게 알았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그는 수도 낙양의 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는 천하의 악이므로 주벌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유총은 "그렇긴 하지만, 내가 너가 항복한 자를 죽인 것으로 인해 더 이상 항복해도 구원받지 못할까 두렵다. 게다가 천도란 신에게 통하는 자이며, 우리가 천명을 이해할 수는 없다."라고 타이르었다. 그 후, 유찬은 신풍에 주둔했다.

10월, 옹주 자사 곡특(麴特)은 왕독, 기특 등을 신풍으로 파견하여 유찬을 공격하자, 유찬은 평양으로 귀환했다.

유총의 유렵에는 절도가 없어,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중군의 왕창(王彰)이 간언하자, 유총은 격노하여 처형하려 했지만, 유찬은 유예와 함께 엄하게 간언했다. 유총은 또 화를 내며 "짐이 하의 걸왕, 주왕, 의 유왕이나 려왕과 같은 폭군이라는 말이냐. 너희들은 어째서 이런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백부인 태재 유연년을 시작으로 제후 100여 명이 유총 앞에 나아가, 모두 관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간언하자, 마침내 유총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왕창을 용서했다. 유총은 "저 발언은 술에 취한 것이고, 본심은 아니다. 경들의 간언이 없었다면, 짐은 과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전원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

8월, 유찬은 족부 유요와 형 유역 등과 함께 진양의 유곤을 공격했다. 유곤은 장교에게 방어하게 했지만, 유찬 등은 이를 격파하고 장교를 참살했다. 태원군 태수 고교 등은 진양과 함께 유찬에게 항복했다. 유찬 등이 진양에 들어가자, 유곤상산으로 도주하여 대왕 탁발의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찬 등은 진의 상서 노지, 시중허하, 태자우위솔 최위를 붙잡아 평양으로 보냈다.

10월, 탁발의로는 탁발육수, 탁발보근 등을 선봉으로 파견하고, 탁발의로는 20만 명을 통솔하여 후계가 되어 낭맹(狼猛)에 이르렀다. 유찬은 그들의 도래를 알자, 치중을 불태우고 포위를 돌파하여 도주했다. 또한, 유요는 분동에서 대패하여 철수했다. 유찬은 유요와 합류한 후, 밤을 기다려 민중을 이끌고 몽산(蒙山)을 넘어 철수했다.

11월, 탁발의로는 추격하여 남곡(藍谷)에서 유찬을 격파했다. 정로장군 형연을 시작으로, 유유, 간령, 장평이 전사했고, 진북장군 유풍이 포박되었으며, 참군 노침은 유곤에게 투항했다.

314년 1월, 유찬은 승상·영대장군·녹상서사에 임명되었고, 진왕(晉王)으로 진봉되어 오군(五郡)을 봉국으로 삼았다.

11월, 유총은 승상의 자리를 폐지하고 상국과 통합하여, 유찬은 상국에 임명되어 백규(百揆)를 감독했다.

2. 1. 황태자 책봉

310년, 유총(劉聰)이 한의 황제로 즉위하자 유찬은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었다. 친척인 유요(劉曜)와 함께 서진(西晉)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311년에 낙양을 함락하였으며, 이후 장안 및 진양 방면의 전선에서 유요와 함께 활약하였다. 당시 한의 후계자는 유총의 배다른 동생인 황태제(皇太弟) 유예(劉乂)였는데, 유찬은 외척인 근준(勤準) 및 여러 환관들과 합심하여 유예를 모함하여 폐위해 살해하였고 뒤이어 배다른 형인 유역(劉易)도 모함하여 살해하였으며, 마침내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 아버지인 유총에게 사마업을 처형하라고 조언했는데 이 때문에 사마업이 처형당했다.

유찬은 유총의 첫 번째 부인 호연황후의 아들이었지만, 유총이 형 유학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후 31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총이 아버지 유연의 두 번째 부인 단황후의 아들인 그의 형제 유애(劉乂)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317년 가을, 유총은 유찬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2. 2. 황제 즉위와 몰락

유찬은 유총(劉聰)의 차남으로, 310년 유총이 한(漢)의 황제로 즉위하자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었다. 31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켰고, 이후 장안 및 진양 방면에서 유요(劉曜)와 함께 활약했다. 유찬은 외척인 근준(勤準) 등과 함께 황태제(皇太弟) 유예(劉乂)를 모함하여 폐위하고 살해했으며, 배다른 형 유역(劉易)도 모함하여 살해한 뒤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 아버지인 유총에게 사마업을 처형하라고 조언하여 결국 사마업이 처형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자 유찬은 황제에 즉위했다. 아내 진씨(靳氏)를 황후로, 아들 유원공(劉元公)을 태자로 삼았다. 유찬은 아버지 유총의 네 명의 황후들(진월화(靳月華)와 범(樊) 황후, 선(宣) 황후, 왕(王) 황후)과 간통하며 정사를 모두 외척 근준(勤準)에게 맡겼다. 근준의 제안에 따라 형제들과 핵심 관료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석륵(石勒)의 영토 공격을 고려하기도 했다.

유찬이 고위 관료들을 죽인 후, 근준(勤準)은 쿠데타를 일으켜 유찬을 살해하고 황실 유씨(劉氏) 일족을 대량 학살했다. 유찬은 그 죄상을 열거한 후 처형되었고, 은제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유원공을 시작으로, 유씨 일족은 노소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몰살당했다. 유요(劉曜)가 한(조) 황제를 칭했지만, 한(조)은 유찬의 죽음 이후 쇠퇴했다.

3. 통치와 평가

유찬은 초기에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으나, 황제 즉위 후에는 폭정을 일삼아 전조의 쇠퇴를 초래했다. 그는 태자비 진씨(靳氏)를 황후로, 아들 유원공(劉元公)을 태자로 삼았다. 장인인 진준(靳準)에게 심하게 의존하여 국사를 맡겼으며, 아버지 유총의 후궁이었던 진월화(靳月華) 등 4명의 황후들과 간통하였다.

진준의 제안에 따라 형제 유기(劉驥), 유성(劉逞), 유맥(劉邁)을 비롯하여 핵심 관료 유경(劉景)과 유의(劉顗)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또한 동부 지역을 통제하는 장군 석륵의 영토 공격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재상이 된 후에는 위세를 부리며 충성스러운 자를 멀리하고 간사한 자를 측근으로 삼았다.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간언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상국부의 건물을 황실처럼 화려하게 꾸몄다. 황제가 된 후에도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신뢰하던 진준이 쿠데타를 일으켜 유찬을 살해하고 황실 유씨(劉氏)를 대량 학살하면서 전조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전조 소무제
  • 어머니: 후연 황후
  • 황후: 진 황후 (318년 책봉)
  • 아들: 황태자 유원공 (318년 책봉)

5. 기타

5. 1. 시호 및 묘호

5. 2. 전조 황제 계보

5. 3. 둘러보기 상자

참조

[1] 문서 jia'zi day of the 7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Tai'xing era of the reign of Emperor Yuan of Jin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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